이미정 《-화,》에 바치는 리뷰
잘 살펴보지는 못 했지만 이미정 작가의 작업노트를 보고 느꼈던 흥미에서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이 흥미는 이미정 작가가 출근길에 보았다던, 철제 구조물과 나무가 서로를 받치는 모습에서 보았을 흥미와 비슷한 것이 될 수 있을까요? 저는 어떻게 이 작업과 저 자신을 맞세워 놓게 될까요? 앞 문장에 담긴 은유적 표현은 작업에 저 자신이 참여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예술에서 ‘참여’란 보통 해석적 성격에 의해 정당화되는 단어입니다. 다시말해 내가 지금 감각한 것(‘-화,’라는 작업물)을 새로운 관념에 스스로 연결지을 때, 그것에 참여한다고 말해집니다. 그러니 퍼포머의 몸에 관객이 직접 각목을 끼워 본다고해서 참여는 아닌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가장 참여적인 예술은 ‘원데이XXX클래스’이거나 마을 주민들이 참여하는 ‘벽화 그리기’겠지요. 그런데 이 작업은 지금 저와 같은 이론가에게는 해석을 자극하지만, 다른 관객 일반에게 그다지 해석을 요구하지는 않습니다. 즉 해석을 해야만 의미를 느끼는 작업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작업은 어떻게 ‘곁에서 보는 것’을 참여로 만들까요?

이 작업을 얼핏 보았을 때 즉각 떠오르는 인상으로 이어가보겠습니다. 만약 이 작업을 ‘정적’이라고 제가 기술한다면, 그건 무엇을 의미할까요? 대개 시간은 움직임에 의하여 인식됩니다. 잠에 들었다 깨어났을 때, 창문밖 하늘도 그대로 어둡고 나의 피로함도 그대로라면, 시간이 별로 흐르지 않았다고 생각하겠죠. 그런 의미에서 움직이는 시간보다 움직이지 않는 시간이 압도적으로 많은 이 작업을 정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자신을 일종의 사물이라고 생각하는 퍼포머의 몸에 작가는 각목을 접목시킵니다. 퍼포머는 어떤 저항도 하지 않고 그 자세를 유지하지만, 신체적 부하에 따라 각목과의 결합을 언제 해체시킬지 스스로 결정합니다. 이는 각목과의 관계가 푹신한 소파에 파묻혀 잠에 들 것처럼 편안하고 쾌적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퍼포머는 각목이 없는 제자리를 찾아갑니다.
저는 ‘정적임’이라는 단순한 인상을 하나 얻은 상태로 해석을 시작했는데, 갑자기 ‘찾아간다’는 적극적 동사가 튀어나왔습니다. 그리고 각목과 접목되어 ‘버티고 있던’ 시간을 ‘찾아감’의 시간으로 바꿔버린 것은, 퍼포머의 “육체적 떨림이 최종적 거부”를 표하는 순간입니다. 손과 발에서 각목이 떨어져 나가는 한 순간, 해체의 시간적 극점이, 그 전까지 멈춰 있던 시간에 극적인 운동감을 부여해줍니다. 저는 갑자기 영화평론가 톰 앤더슨을 이해하게 됩니다.[각주1] 그는 5시간 21분 동안 잠 자는 사람을 보여주는 앤디 워홀의 이상한 영화 《잠Sleep》을 스릴러 영화라고 부릅니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서는 당시 카메라 필름 길이의 한계라는 물리적 이유로 잠자는 남자를 리얼타임으로 보여줄 수가 없고 불가피하게 컷이 발생하는데, 부재한 움직임에 시간 감각을 잃어버린 관객들은 마치 언제 괴물이 나타날지 모르는 것처럼 대체 언제 컷이 발생할까 알 수 없는 서스펜스의 상태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해석은 다소 투사적입니다. 왜냐하면 그럴 수는 있지만 실제로 그렇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즉 이 해석 속에서 해석의 내용은 정당하고 흥미롭지만, 실제로 이 영화에서 서스펜스나 놀라움의 감각을 느낀다는 것은, 길다란 손가락에 흥분하는 페티쉬처럼 관념에 대한 페티쉬가 있지 않는 이상 불가능합니다(모종의 이유로 이 영화를 봐야만 했던 제가 장담합니다). 애초에 서스펜스가 관객의 의도나 추측이라는 수용적 상태에 준거하여 그것을 이용하는 것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화,’는 실제로 그러합니다. 주된 이유는, 관객의 관념보다 그 공간을 매우는 감각에 근거하기 때문입니다. 이 작업을 간략한 어휘로 묘사한다면 “대체로 유사한 패턴이 계속해서 반복된다”고 말할 수 있겠죠. 그러나 각목이 떨어지는 ‘-화,’의 순간에 이르는 과정을, 우리는 워홀의 잠자는 남자를 볼 때처럼 ‘무의미하다’고 느끼지 않습니다.[각주2] 그 유사함이 항상 다른 세부적인 변화형으로 구현되기 때문입니다. 당연합니다. 작가가 퍼포머의 몸에 각목을 접합하는 형태가 매번 다른데 패턴이 같으려면, 그것이 다른 변화형으로 반복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하여 이 퍼포밍은 우리가 몇 시간 동안 지치지 않고 파도를 바라보거나 나무가 흔들리는 것을 바라볼 수 있는 것처럼, 바로 그렇게 상황을 바라보게 만듭니다. 동일성과 차이가 공존하기 때문에, 동일함에는 질리지 않고 다양함에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어지러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다시 돌아가, 그러면 ‘-화,’는 어떻게 ‘보는 것 혹은 느끼는 것’이 참여가 되게 만들까요? 워홀의 작업 그리고 앤더슨의 해석과 비교해보면 분명합니다. 워홀의 《잠》은 해석을 요구합니다. 혹은 의미작용의 포기를 요구합니다(실제 《잠》의 리뷰들을 보면, 관객들은 자유롭게 핫도그를 먹으러 나갔다 오고, 전화를 받으며 잡담을 합니다). 반면 ‘-화,’는 어떤 해석의 개입으로 의미작용이 발생하지 않고 의미작용 자체로 물질화되어있습니다. 즉 제가 한 것은 별도의 관념적 질서를 세운 것이 아니라 이 의미작용의 단위들을 언어로 기술한 것입니다. 각목이 넘어지는 순간은 거기까지 따라온 시간에 의미를 부여하지만, 이것은 감각에서 감각으로 넘어가고 변용된 것이지(의미작용), 의미있다고 부를 만한 어떤 관념이 그 이전까지의 무의미한 관념을 해석함으로써 ‘인식’하거나 외부의 관념을 지시한 것이 아닙니다. 즉 전시제목과 작가의 작업설명은 ‘-화,’를 “애매모호한 과정(상태)”로 “끝없이 실패하는 시도”로 기술하지만, 실제 작업은 너무나 분명한 결과들의 연속이며 끝없이 의미작용을 발생시키고 있습니다.
이것이 물질적으로 전면화되어 있느냐 배후에 흐르느냐가 상당히 다르지만, 유사한 의미작용을 최근 관람한 어느 영화에서도 보았습니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드라이브 마이 카》는 3시간에 이르는 긴 러닝타임이지만, 다른 맥락에서 시간 감각을 느끼기가 어렵습니다. 마블 영화를 볼 때처럼 정신 없는 이미지와 빠른 편집이 폭격하는 것이 아님에도, 흔히 말하듯 1시간 같은 3시간이었습니다. 이것은 서사극 형식에서 ‘인물’이라고 불리는 특정한 행동 모델이 요구하는 시간성을, 영화 형식이 거의 정확히 포착하고 따라가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시간’ 자체를 물질화하여 다루는 소위 실험적인 영화들과는 결이 다릅니다. 그리고 관객이 어떤 담론이나 지식을, 예컨대 해석학자 폴 리쾨르의 『시간과 이야기』나 철학자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알고 있어야만 이를 감각할 수 있거나 더 잘 알게 되는 그런 류의 작업도 아닙니다(그래서 이런 작업들을 기존의 의미 담론으로 치환하는 평론들을 볼 때면 징그럽습니다). 영화를 보고 그런 책들이 읽고 싶어지는 것도 아니고요. 다만 하마구치 류스케 본인은 읽었을지 모르죠. 이미정 작가 작업노트에도 헤겔이 있더라구요.
다행히 다시 작업노트로 돌아왔습니다. 이 작업이 얼핏 보이는 것이나 묘사하는 것과(소위 미니멀하다고 할까요), 실제 퍼포밍의 시공간에서 감각하는 것, 그리고 그 감각의 과정이 다소 다르다면, 작가의 작업노트는 그 맥시멈 자체를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압축적인 메모와 단상들이 얼키설키 진행되고 (물리적 시간 자체는 불가피하게 선형적인 것처럼) 노트의 페이지는 그저 앞으로 넘길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자르고 나눠 단상들을 비약적으로 이어붙일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습니다.
위 문단은 작업의 자족적 구조를 작업 노트라는 다소 외부적인 항과 연결해본 것입니다. 더 나가볼 수도 있을까요? 이제부터는 다소 해석적입니다. 이 전시가 작가에게 자신의 “중단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게 만든 것은, ‘직전의 시간을 변형하는 극점의 행위’라는 작업의 형식적 도식과도 상응합니다. 그래서 “3년의 공백을 그저 안타까운 것이 아닌 예술활동의 전후 연장선으로 바라보게” 해줄 수 있었고 “그래서 또다시 중단 되겠지만 내게 의미가 전혀 다를 것”이지요. 적다보니 무슨 인생살이 태도를 작품에서 추출하여 미학화하는 ‘문학 평론’ 같은 것이 되는 것 같으니 그만하겠습니다. 다만 전시 이후에 작가와 대화하는 자리에서, 기획자가 설정한 ‘중단’이라는 키워드를 작가는 별로 무관하다고 생각한다는 점이 흥미로웠습니다. 기획자가 끼운 각목을 금새 떨어뜨려 버리는 것 같다고 할까요.
위 문단까지만 써도 충분합니다만, 마지막으로 사족을 달며 완전히 밖으로 나가버리겠습니다. 저는 이와 같은 글로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퍼포머의 건강 악화로 전시가 예정보다 일찍 중단되었고, 이에 대한 ‘위로’로써 기획자께서는 저에게 감상을 남겨줄 수 있을지 부탁하셨습니다. 오늘 정오쯤에 8~9문장 정도의 짧은 글을 부탁하셨는데, 어느새 5,000자에 이르는 글을 쉴 새 없이 적어 내려왔습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형태의 참여는 또 어떠한 해석과 참여를 유발할까요? 눈덩이 구르듯 굴러가 언젠가 이미정 작가는 국내외 레지던시와 수상을 휩쓸며 여타의 갤러리와 뮤지엄에서 개인전을 열게 될까요? 수건과화환은 세계적인 아트마켓들에 출품하거나 포스트-신생공간의 상징성을 잇는 계보화에 참여할까요? 저는 XX비평상을 받고 분량무관 원고료 100만원을 땡기며 대학의 교(강)사 자리나 백화점 강의를 도맡는 평론가 같은게 될까요? 어떨지 잘 모르겠고 관심도 없습니다만, 물질과 관념을 연결 짓고 찾아가는 게 해석인 것처럼, 작업 바깥에서도 우리의 해석적 참신함이 작동하기를 바랍니다.
그럼이만 퍼포머의 건강이 회복되기를 진심으로 기원하면서, 좋은 작업으로 사유를 자극해준 이미정 작가와 기획자에게 부족한 글로나마 안부가 되기를 바랍니다.
- 각주 1 :「타협 없는 60년대: 워홀의 영화를 보는 것」, 김혜림과 강덕구 옮김, 비평공유플랫폼 콜리그, 2021년 4월 메일링 서비스에서.
- 각주 2 : 이것이 워홀의 작업에 무언가 결함이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앤더슨의 분석대로 팝아트는 본래 지루한 것을 재현적인 것으로 바꾸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이여로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