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불가능 전시’ 기획서 1차

수건과 화환

후암동 105-52


지속가능성에 대해

지속가능성의 넓은 의미에 대해 정의하자면, 환경 및 개발에 관한 세계 위원회(WECD)의 브룬트란트 보고서에서는 지속가능한 발전(Sustainable Development)을 앞으로 다가올 세대가 필요를 충족시킬 능력을 저해하지 않으면서 현 세대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즉 세대를 거쳐 물려주게될 환경과 자연 자원에 대해 인류의 존속을 담보하는 범위로서 새로운 규정을 내린다. (KSI대한민국지속가능성지수 참고: 국내 기업들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실천과 공약들을 검토하고 평가하는 기관)

KSI대한민국지속가능성지수 홈페이지와 보고서 DB에 나열된 기업들의 지속가능성 진행안

하지만 지속가능성을 위한 ‘자연과 환경’이라는 단어를 사용함에 있어 매우 꺼림칙하게 느껴진다. 마치 인간이 파괴자임과 동시에 보호자로 인식되어짐으로 자연을 영위, 파괴, 지속할 수 있는 존재로써 이중적인 모순점이 드러날 수 밖에 없다. 철학자 케이트 소퍼Kate Soper가 쓴 “What is Nature? : Culture, Politics and Non-human”(1995) 에서 말했듯 ‘자연’’은 매우 복잡한 단어이자, 자연에 대한 생각은 ‘누가 인간 공동체의 완전한 구성원이 될 자격이 있고 왜 그런지에 대한 신념의 변화를 기록하는 역할’로 볼 수 있다. 인간이 정의내리고 실생활에 사용하는 형이상학적인 자연의 개념은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는데,

  1. 인공을 가하지 아니한 본디 그대로의 현상과 그에 따른 물질
  2. 사람을 포함, 순환되어지는 섭리에 따른 완벽의 상태를 추구하는 만물의 상태
  3. 인위적이지 않은 행동이나 현상
  4. 산, 바다, 호수, 강과 같은 자연 환경

사회가 제시하는 ‘지속가능성’의 의미는 집요하게 ‘2번’을 선택하는 것이며, 결코 다른 의미의 ‘자연’을 끌어들이지 않고 현재의 시스템을 ‘친환경적’으로 유지하려는 목적이 크다.

니콜라 부리요Nicolas Bourriaud의 ‘Exform’(2015)의 도입부에선 도시의 쓰레기 더미, 사회에서 낙오된 부랑자, 체내에 쌓여지는 콜레스테롤 수치 등 어디로도 사라지지 않은 사회 현상들을 다루며,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사상 그리고 자본주의가 제시하는 ‘마찰’이 적은 친환경적인 소비에 대한 제안들을 비판한다. 사회는 비생산적이라는 것, 의미가 없다는 것에 대한 공포에 쫓기는 중이고, 결코 욕구의 소비라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자연이 인간의 통제 밖에 있는 사물의 세계이고 궁극적으로 ‘우리 자신에게 “타자”인 것을 개념화하도록 하는 관념’으로 본다면, 과연 환경을 외치며 문명 또는 진보적 사회 발전을 위한 이러한 지속가능성을 위한 움직임에 찬사를 보낼 수 있을지, 과연 KSI대한민국지속가능성지수 같은 자본주의의 사회적 시스템으로부터 친환경이라는 목적에 합당할까 의구심이 든다.

예시) 삼성디스플레이(2021) <삼성디스플레이 지속가능경영보고서 2021>

지속가능성의 궁극적인 목적은 인간이 파괴한 생태계와 그리고 지금껏 변질시켜낸 자연을 복구시켜내야한다는 친환경적 변화가 주목적이 아닌, 현 인류의 파괴성을 인정하고 그 행위를 자본주의적 접근으로의 합리적인 수준으로 맞추는 것이다. ‘Poetics of Relation’(1990)의 저자 에두아르 글리상Édouard Glissant은 침략적이며 정복적인 인류사를 다루며, 국가 간의 경계가 확실해지며 더이상의 가시적인 침략은 보이지 않지만, ‘인권’과 ‘환경’이라는 주제가 범세계적인 침략적 도구로 어디든 관여하고 있다고 말한다. 지속가능성에도 한 사회나 국가에 국한되지 않고 세계적인 흐름으로서 제시되고 있음을 인식하면, 자연과 환경 보존이라는 명목하에 거절할 수 없는 만장일치를 얻어 신자본주의의 사회로 안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예술 사회의 지속가능성

사회의 유행을 거의 동시적으로 반영해야만 하는 필요성을 느끼는 것이 예술 사회의 동력이다. 비판과 과정에 대한 무의식적인 표출들로 새로운 관점을 생성시키며 사회와 유기적으로 뒤섞이는데, 그렇기에 예술 사회는 사회의 흐름, 경제, 정치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고 하나의 거울처럼 그대로 비춰내기도 한다.

근래 부산현대미술관의 <지속가능한 미술관 : 미술과 환경>(2021)부터 대안공간 시청각랩의 <폐기의 기술>(2021)까지 시작해 언급되는 지속가능성의 주제를 다루며 향후 예술 사회의 방향성에 대해 고찰을 시켜주었다. 그 뿐만 아니라 전시 기금을 후원하는 정부나 기업, 그리고 관람객에게 긍정적인 이미지를 안겨다 주는 것은 물론이다.

<지속가능한 미술관> 전시 전경, 미술관 전시장에 전시된 직전 전시에서 나온 3t 규모의 폐기물

미술관에서 사용되는 일회용 전시 소모품: 가벽, 조명 전구, 시트지, 전시 후 남은 리플렛 더미는 예술 관련 직종자들이 매번 마주하게되는 불편한 폐기물들이다. 이는 오늘날 지속가능에 대해 화두가 되기 이전부터 다뤄져오던 문제이며, 지금 이 문제가 지나가게 되면 기존의 방식으로 다시금 처리하게 될지도 모르는 고착된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부산현대미술관에서는 지속가능한 미술관이라는 주제로, 시트지나 잉크 대신, 프로젝터와 수기로 작성된 캡션을 사용했고, 전시에는 이전 전시로부터 폐기된 쓰레기들과 재활용 가벽들을 동시에 설치해 전시의 소모값과 그것을 줄여야하는 이유와 대안을 제시했다. 위 사진처럼 폐기에 대한 방식이 거칠고 ‘무질서’스러운 만큼 비-친환경적에 대한 공포와 파괴성을 잘 살렸다.

하지만 이러한 전시는 대중들로부터 친환경을 잘 실천하다고 느끼지만, 정작 대중들이 보는 상업적인 갤러리의 대형작가의 화려한 전시, 현재 국립현대미술관의 히토 슈타이얼 전시, 신생공간에서 개인전을 개최할 때 이러한 지속가능성에 대한 영향력이나 실천여부에 대해서는 실질적인 제안이 되지 못한다. 친환경적이며 물리적 업무적 소모성을 줄이는 전시를 실천하기에는 또 하나의 꼬리표가 붙는 셈이라 품이 많이 들어가게 되는 일이며, 제정적으로 더 값이 나가는 것이 친환경의 소재이기에 접근하기 어렵게 다가올 수 밖에 없다. 과연 ‘지속 가능함’의 범위를 규정함에 있어 개인 혹은 신생공간의 작은 규모에서부터 실천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든다.

개인적으로 예술사회에서의 지속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는, 작가로서의 직업적 고충, 예술사회의 피라미드적 구조, 신생공간의 어려운 재정란으로 인한 존속 여부를 다루는 일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예술사회는 이에 대한 범주를 가뿐히 뛰어넘어 환경을 다뤄야하니, 실천 가능한 예술 사회에서 광범위하게 지속가능성을 주장하기는 사실 어려워 보인다. 게다가 전시라는 비영속적인 특성과 무용성을 다루는 예술에서 환경성을 따지는 것이 정치적인 이유 외에는 그 필수성이 따르지 않는다.


‘지속불가능 전시’ 기획 키워드

-신생공간에서의 지속가능성 = 지속불가능

지속불가능을 외친다는 것은 실질적인 실천이 불가능하다는 것에서 비롯되었다. ‘지속가능함’의 긍정성이나 적극성을 느끼지 못한채 현재라도 유지하기 위한 주장이자, 지속가능하다는 맹목적인 것에 대한 거리를 둔 성찰이다. 실질적으로 다뤄지는 전시 소모값을 그대로 노출하며 전시라는 노출 목적이며 일종의 행사를 위한 소모품들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신생공간의 최소한의 예산으로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을 지속가능을 말하는 기관과 반대의 노선을 타는 것이다.

지속’불’가능은 신생공간의 실질적인 이야기이고, 폐기의 기술이며, 작가와 상생하며 예술을 실천하는 이야기를해보려 한다.

*폐기의 기술 : 실질적으로 신생공간이 어떻게 전시를 준비/철수하는지에 대한 고유한 기술을 보여주는 것.

정원을 마주하는 듯한

사물에 거리감을 두고 사유하는 대상의 정원

하나의 소모품들이 전시가 철수/진입하는 과정을 멈춰내는 사유의 오브제.

전시 철수와 다음 전시의 과정에서 널브러진 공구와 지난 전시의 설치물들 그리고 새로운 전시 설치과정에서 결국 소모하고 낭비하는 것 그대로 노출되어 면밀히 지켜보았으면 한다.

:가레산스이식의 정원 = 인위적인 자연 <-> 친환경적인 것과의 애매한 거리감이 재밌을 것 같다

작가의 지속가능성

예술 작업은 무용성을 담보로 제작이 되며, 가치를 잃은 도구를 다시금 재사용하기도 하지만 반대로 환경적으로 가치있는 오브제들의 기능과 목적을 제거시켜버리기도 한다. 지속가능성을 얘기하기 위해서 만들어지지 않는다면 대부분의 예술작업은 재정적인 것, 물리적인 것에 대한 제약에 비해 환경적인 제약은 소수에 불과하다.

작가의 지속가능성에 대해, 작품이 창작되어지는 작업실이 주요 배경이 되어, 작가로써, 작품이나 기타 작업 환경들로부터 느껴지는 지속가능성에 대한 주제를 새롭게 제안한다.

: 작가의 작업실에서부터 전시까지 이어지는 과정을 관찰의 형태 혹은 색다른 접근 방식으로 지속불가능에 대한 전시공간과 작가의 이야기를 진솔하게 했으면 한다.

(현재 전시 기획 진행 중이며, 본 기획서는 고정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수정되고 변형되며 전시에 대한 과정을 반영할 예정입니다. )


©본 기획서는 ‘수건과 화환’의 고유한 저작물로 무단 도용과 복제를 금합니다.

수건과 화환

wreathandtowel@gmail.com

용산구 후암동 10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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