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02 03 /// 김소희 ]

*전시 기간 중이 아닌, 작가와 전시의 피드백를 위해 별도로 마련된 전시 리허설 관람자

2/3 수건과 화환 전시 리허설

“퍼포머의 신체가 특정한 면적와 모양을 가진 검은 면 같았습니다. 이 퍼포머는 어떤 특질을 가지고 작가의 통제권 아래에 놓이게되었을까, 성별(남성 작가가 여성 퍼포머를 같은 방식으로 움직였으면 불편했을지도 몰라요), 혹은 키와 무게.. 퍼포머가 다른 인간과 구분되는 점이 무엇일까 궁금하게 되었어요. 작가보다 키가 크고, 무게가 아마 조금은 더 나가기 때문에 퍼포머의 다리를 들어올려 그 아래 각목을 놓는 일은 작가에게 일정한 수치의 힘을 들이게 합니다. ‘그’ 퍼포머이기 때문에 각목을 덧대어 신체의 균형점을 찾는 일은 ‘그’가 원래 어느 발로 짝다리를 짚는지와 연관이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퍼포머가 왜 이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은 채로 진행되었기에 되려 그 질문에 골몰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BDSM처럼 작가와 퍼포머의 관계는 지배와 통제라는 단어를 연상시켰습니다. 마음대로 퍼포머의 자세를 어렵게 바꾼 후 가만히 의자에 앉아 지켜보는 침묵의 순간에 그 관계가 도드라졌습니다. 퍼포머는 ‘평면적인 형태’로, ‘서 있기’라는 하나의 기본 자세로 놓여있는 반면 작가는 공간을 입체적으로 돌아다니고 무대의 안팎을 가로지를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랬습니다. 그런데 계속 보다보니 퍼포머도 은근히 작가가 원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통제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사물화되었다 하지만 그는 살아있는 인간이고, 선 자세로 완전히 힘을 빼어 무게를 실을 수는 없어서, 단순히 글로는 전할 수 없는 아주 미묘하게 왕래하는 힘의 방향을 관찰할 수 있었어요.

퍼포머는 자신의 신체 그 자체로 작가의 선택권을 제한하며, 작가는 퍼포머의 편안함을 무시하고 균형점을 제멋대로 옮긴다는 점에서 사실 서로 일종의 통제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이건 BDSM의 규칙과도 비슷하지 않나요? 실제로 섭이 자신의 신체의 통증과 한계로 돔에게 ‘허용된’ 범주를 결정하는 최종 결정권자이기도 합니다.) 현장에서는 각목의 길이가 퍼포머의 신체 수치와 연관이 있겠거니 했는데, 각목이 수건과화환에서 파생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해당 공간에서 작가가 퍼포먼스를 수행하기 위해 퍼포머의 신체를 공간에 맞추어 변형시킨다는 거시적인 사실과 상통하는 은유 같았습니다.

작가는 퍼포머 뿐 아니라 퍼포먼스가 벌어지는 상황 자체를 통제하는 인물이었습니다. 관람하는 내내 침을 삼키기 어려운 침묵 자체가 저를 압박한다고 느꼈습니다. 퍼포머의 전면을 ‘바라보기’라는 하나의 동작을 지시받은 것처럼 자세를 바꿀 때에 눈치가 보였습니다. 현장에서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고 타인의 뒷면을 바라볼 수도 있는 사람은 유일하게 작가였기 때문에, 관객으로서 저는 일종의 ‘사물화’가 되었다고 느꼈습니다. 작가, 퍼포머, 관객 이렇게 세 집단이 서로의 신체를 밀고 당기는 힘의 관계를 집중해 느낄 수 있는 자리였습니다.”

김소희 기획자/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