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시학
에두아르 글리상 Eduard Glissant
*이 글은 출판이 아닌 개인 번역작업이자 예술활동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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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장과 유래
서양 세계에서 신화와 서사시의 숨겨진 원인(그 결과)은 그 유래에 비롯된다, 그 작업은 고정된 일직선상 위에 놓여, 항상 투영도, 예측을 향한다.
우리는 유래의 필수성에 대해 활력을 불어넣은 서양의 철학들로 에너지가 순환되었을 거라고 추측할 수 있다. 시간이 직선으로 그려지지 않았거나 (인도를 예로들어) 또는 철학가들이 ‘하나’가 아닌 ‘모든 것’을 고려했던 곳에선 건국 신화들이 유래의 과정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세계의 기원에 대한 개념(그것의 창조)들은 그 최초의 행동으로부터 종(인종 또는 사람)의 뿌리를 내려올 수 있었던, 계보적 배열에선 확증되지 않는다.
유래에 관한 “세계 창조”의 이야기(증명)은 같은 친자관계-또는 합법성-은 현재에서부터 최초의 행동까지, 공동체의 흔적을 역으로 기술함으로써 논리적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보증한다. 이 관점은 모든 서구 신화의 기원은 아니지만, 이러한 문화들의 진화를 결정짓는 지배적인 관점이다.
모든 경우에, 그리고 필연적으로, 신화적인 공동체는 유래의 사슬 고리로써 주요한 차원의, 개인의 어떤 생각보다 앞서있다.
일반적인 비교를 하자면, 불교 신화는 시간적 윤회에 근본을 두고 독특하게 개인을 (그자체는 불멸 또는 거의 그 수준)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그 개인의 “이야기”가 ‘전체’로 분해되어지는 것을 통해 자기-완벽을 이루게 된다. 부처는 자신의 유일성이 이 성취로 인해 근본되어지는 개체화의, 독창적이진 않지만, 대표적인 예이다. 유일해지기 위해 일반화될 수 있는 이해의 전반적인 결핍으로, ‘하나’ 는 유일성과 구별되어진다. 지식의 주체가 되지 않는 의식적인 계율들의 수집에 힘입어, 각 개인들은 부처의 본을 멀리서부터 따를 것이다. 그 공동체의 연대순-그 일직선상(서쪽에서는 역사가 되어버리는 것)-은 그곳에서 완전히 무능하다.**
*마야인과 아즈텍 사람들 사이에서 순환적 시간은-사건들의 날짜 계산에 대한 열정으로 부벽을 대며-친자 관계에 대한 소질과 맞물려, 고대 시간을 가능한 한 멀리 거슬러 올라가려한다, 하지만, 의심의 여지가 없는 세계의 “창조”에서 스스로를 고정시키게 된다.
**중국 문화에 관련되어서 나는 이런 평가를 내린다. 적어도 내가 아는 바로는, 우리는 아직 이러한 문화들이 역사철학을 어느 쪽으로 직시하든 간에, 역사적 관계로 귀속시키는지 완전한-지각으로 연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러한 움직임들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을 다시 한 번 요약하여 설명하고, 어떻게 우리의 견해에 들어왔었는지 고찰해본다. 그리고 종종 우리는 실수를 저지른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들 자신의 길을 되짚어 돌아가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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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에 서양 신화들은, 그가 공동체의 속한 범위에 있어서의 개인을 구상한다. 이는 그리스도(히브리 족속에서 탈피하여, 그것에 의존함과 동시에, 그리스도의 보편성으로 인간을 데려온)의 형태를 취한다. 이는 개인으로 하여금 공동체의 진보에 대한 그의 존엄성을 보조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그시점에서 (숨겨진 원인으로서) 유래의 사슬은 경멸당하거나 거부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무엇보다 그 ‘아들’이다. 그는 친자 관계를 신성하게 한다, 다윗의 후손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 그 자체이다-그리고 아마도, ‘그 또한’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은 이단의 주장이 될 것이다.

기독교 개체화는 순환적 쇄신인 역사의 흐름을 초래하지 않았다, 반대로 직선상의 시간-그리스도 이전과 이후의-을 보편화함으로써 인간 종의 연대기를 널리 쓰도록 가져가 주었고, 인류의 역사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이 예시에서 그리스도는, 공동체의 역사들을 이 일반화된 역사로 통합하면서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주장되어 왔다.
그러나 이 기독교적 친자관계의 사슬은, 과학에 기초한 또다른 연속적인 배열인 진화의 연계 안에 인류를 묘사한 그 순간 더 이상 절대적이라 여겨지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이 연계성은 오래된 친자 관계의 객관화된 시각일 뿐이며, 민족공동체의 정통성이 아니라 잘 알려진 종의 자연적인 보편성으로 적용되어졌다.
그 순간 그리스도로부터 고무되어진 일반화는, 비록 애초에 서로를 거부했지만, 다윈의 일반화 이론으로 대체되어졌다. 그들은 공동체의 운명에 연결된 오래된 신화적 혈연 관계를 초월하는 것에 관심을 가졌고, 직선형의 원칙이 갖는 힘, 그것이 “파악하려는”, 그리고 정당화시킨 역사를 간직하는 보편화의 개념을 넘어서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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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설적이게도, 불교 사상에서는, ‘전체’ 안에서 개인을 해체하는 것이 목표인, 오직 개체화만이 존한다. 서구적 사고 체계에서는, 인간 개인의 존엄성을 염원하고 개인의 모험에서 비롯된, 서구적 사고 체계에서는-또다른 역설- 오직 일반화로만 이르게 된다. ‘하나’에 기초한 철학들은 (자연사든 인류의 역사이든 간에)역사의 배아를 그들 안에 잉태한다.
지중해 연안의 신화에서 우리에게 말해주 듯이, ‘하나’를 생각하는 것은 ‘전체’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이 신화들은 공동체들을 표출해 내는데, 각 공동체는 자기자신은 순진하게 투명하고 다른 공동체에게는 위협적으로 불투명하다. 비록 그들이 불명료하거나 사악한 방식들을 택할지라도, 그들은 기능적이다. 그들은 상대방에 대한 개인의 불투명성은 극복할 수 없으며, 결과적으로 상대방이 얼마나 불투명하더라도 ( 신화는 상대방의 정당성을 결코 제공하지 않기에), 항상 한 공동체가 경험한 투명성으로 다른 이들을 줄이는 문제가 될 것이라고 제안한다. 다른 하나는 동화 되어지거나, 소멸되어질 뿐이다. 그것이 일반화의 전체적인 원칙이고 모든 과정이다.
그러므로 신화는 유래에서 드러나게 되는 보이지 않는 폭력을 수용하면서 관계의 요소로서 상대방의 존재에 절대적으로 도전한다. 서사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하나의 공동체, 그리고 그-안에서만 ‘존재’ 방식들을 가려내는데, 그것은 결코 그것을 ‘관계’라고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신화든 서사시든, ‘존재’(나는 ‘존재로서의-존재’라 부르겠다)는 분명히 개인의 본질에 관여하지 않을 뿐더러, 서사시에서는 인격에 대한 “징후”조차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플라톤과 함께, 개인은 영혼의 무덤이 된다. 이런 식으로 이 철학자는 개인화와 일반화의 과정을 근동사상의 전통에 도입했는데, 이 전통은 때로는 조화롭고 때로는 모순되기도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출현과 함께 완성(해결)될 것이다. 그리스도, ‘그’ 스스로, ‘타락’ 없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내 보였고, 유전의 무게 없이 친자관계를 증명해내었다. 그에게 파르메니디안 Parmenidean 존재와 플라톤적 영혼이 연결되어 진다. 그러나 이것이 플라톤과 함께 일어난 서양 사상의 진정한 “끊임”에 대한 사례를 만드는 것은 가능하다.
구약성서에서 유래는 명백했다; 하지만 일리아드에서는 내포되어 있었다. 일리아드에서 명성이 높거나 선택된 신의 아들들이 그들 중에 있는 불멸의 경쟁상대와 극을 이끌어간다. 이는 헬렌의 납치(동서의 피를 섞는-혼혈화의 위협과 함께)로 인해 혼란에 빠진 정통성, 그리고 오디세이(율리시스와 페넬로페의 서로를 향한 신뢰)에 비극적 추진력을 제공하는 발견과 지식의 프로젝트와 분리할 수 없는 정당성; 알렉산더의 서사에 쇠약함의 원인의 (혼혈화가 현실이 된)모든 경우에서의 정당성이다. 친자관계는 아에네이드에세 필수불가결이다. 그리고 만약 단테가 신곡 The Divine Comedy 에서 유래에 의지하지 않았다면 (그 땐 그리스도가 이미 보편적인 교회를 이루었기 때문에),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질(당신은 안내자, 당신은 주님, 당신은 주인입니다 tu duca, tu signore, e tu maestro )의 계몽된 길잡이 아래 그는 지옥까지의 여정-짧게 말하자면, 우리의 세계로-을 떠난다. 그]는 단순히 그 당시 버질이 시학의 대가였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당시 그리스도와의 단절을 넘어가 트로이, 신화의 매트릭스들인 트로이 도시와 (유래와 그 행동의 관계를 통한)연속성을 확립했기 때문이다. 호머에서 버질까지 혼혈화의 위협은 더이상 재앙처럼 보이지 않았다. 따라서 기독교의 보편화의 가장 위대한 기념물 중 하나인 신곡의 등장부터, 세계의 창조와 연결되는 고대 신화들과 새로운 종교, 이 둘 모두가 공유하는 유래를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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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이 두가지 일반화된 서구적 “운동” (기독교와 다윈주의)에 관한 내 생각을 줄이고, 요약해 단순화한다면, 그리고 그것들에 상응하며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불교와 비교한다면, 나는 다음과 같은 공식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 인종의 구분이 없는 완전한 공동체에, 친자관계의 정당성과 함께, 인류 역사를 발족하는 개인화 행위들이 덧붙여진다. 이로써, 이 독점적인 유래의 선형성은 일반화를 다양화시킬 수 없는 선형성에 의해 계승되어진다.
다윈.- 본래 구별되지 않았던 것에, 진화를 통치하고 속 genera 과 종 사이의 구별을 결정하는 ‘선택’ 과정이 적용되어진다. 그 과정의 선형성은 자연사의 다양화할 수 있는 일반화로 이어진다.
부처.- 순환적인 원시의 움직임을 통해 개인은 ‘전체’ 안에서의 용해를 향한 완벽의 수행을 추구한다. 그의 연이은 삶은 이 완벽함의 주기(“그 역사들”)이며 선형성을 구성하지 않는다. 이 과정의 끝에서 그는 환생한다: 그는 동일하면서도 타인이다.
기독교의 일반화가 선택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거의 중요하지 않지만, 다윈의 일반화는 객관적인 관찰의 결과였다. 둘 모두 공동체의 배타성이나 자연의 이질성에 반하는 동일한 보편성의 정신과 연결되었으며, 둘 모두 한 줄의 끝에서 충족되어지며, 둘 모두 이미 그리고 더 나아가 ‘지식’의 확산이 된다. 불교의 환류성은 절대 일반화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이것은 선형적이지 않고 개인화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열반에 대한 접근은 지식을 통해 일반화하기는 불가능하지만 지식들을 통해 구체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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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서사시와 비극의 결과(숨겨진 원인)는 정당성의 설립이다.
비극은 공동체-사회적 동의가 위협받는 어느 상황에서건 발생하기 마련이다. 무언가가 “비극적”인 이유는 공동체가 그 ‘유래’의 사슬이 끊어져버린 것을 느끼는 순간까지 그 위협이 발견되지 않기 (잠정적 중단 혹은 지연된 것) 때문이다. 그 비극적인 행동은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을 밝혀내는 것이다.
비극을 초래하는 것, 그것은 공동체를 해체로 이끌며 위협하는 부정한 것이다. 불명함과 폭로의 기술인, 비극적인 행동은 이러한 해체를 정당성과 그것의 재설립을 탐색함으로 해결하려 한다. 신화와 서사시에서, 이와 같은 탐색은 모든 공동체가 자신을 창조의 첫 번째 행위와 연결시켜주는 엄격한 승계를 보장해주었다. 만약 정당성이 파열된다면, 그 유래의 연쇄는 의미가 퇴색되고, 공동체는 세상을 떠돌며, 더이상 어떠한 근본적인 필연성에 대한 주장도 제기할 수 없게 된다. 비극적인 행동은 이 불균형을 흡수해버린다.
비극적인 행동은 진취적이고 불투명하게 수행된다. 그 유래(절대적으로 배타적인)과 관련된 그 폭력성은 정면으로나 동시다발적으로 직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대립은 이해의 과잉, 일종의 의식의 단락으로 공동체에 동요를 남겼을 것이다. 전쟁과 정복은 공동체를 위해 이 타인을 배제시키는 폭력을 가린다. 그러나, 그 명분이 계산되거나 증흥적으로 만들어낸 전장을 용감하게 견뎌낼 수 있는 것들은, 뿌리의 신성한 사색을 견딜 수 없게 된다. 그때부터 공개술의 비극이 중요해졌다. 오이디푸스는 그의 안에 있는 진실을 “첫 눈에”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또한 왜 ‘도시’가 분해되어지는 것을 해결하려 스스로 짊어진, 비극적-운명의 영웅을 선출하는 것과 같은 세력에 의해 위협을 받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대중 의식은 결의안을 논의한 능력이 없었다. 논의를 일반화 (정치화) 하는 것은 공동체가 더이상 유래로 보장되는 원시적이고 신성한 정당화가 아니라, 다른 공동체와의 문제적인 (위협적인) 관계에 새겨져 있다는 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이 관계는 이미 “확대” [l’étendue]라 불리는 것으로 구조되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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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왜 그리스 극장에서 비극(등장인물들이 다양화되어지고 불어남으로써, 그들의 동기를 노출시킨다-모든 아이스킬로스부터 소포클레스에서 에우리피데스까지의 “발전들”)의 힘으로 버팀목을 괴는 (“확장”하는) 시도들은 신성한 경외에서부터 멀어지는 길과 동등하게 작용되고, 점차 극장의 시민들이 드라마, 코미디, 그 외 형태들이 도입될 때까지 이어진다.
예시적인 사건으로, 오이디푸스처럼, 그 신화에 대한 프로이트의 해석은 그곳에 포함된 유래의 과정을 확인하고 이 과정을 일반화하려고 시도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새로운 종류의 보편화에 반대하는 것은 사실, 우리가 정의하는 확장, 세력, 그리고 현실이며 그들의 전제는 유래의 반대라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셰익스피어는 그의 연극에서 이 정당성의 작업을 입증했다고 여겨진다. 만약 덴마크에 뭔가 썩은 것이 있다면, 햄릿을 희생양으로 카타르시스를 요구하며 왕위 계승의 “선”이 깨뜨려 버렸기 때문이다. 같은시기에 카모엔스는 그의 서사시에서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 출발한 영웅들의 공동체 대신 노래를 부르며, 위안적인 영웅의 희생은 포기했다.

그러나 템페스트에서 셰익스피어는 이 두 가지의 차원, 즉 건국적 정당성과 정복의 힘은 궁극적으로는 함께 작용한다고 여겼다. 프로스페로는 캘리번과 그 구성 요소들, 그리고 세계를 지배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진 밀라노의 합법적인 공작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도시’의 운명은 알려진 것의 차원들, 그리고 식민지화될 수 있는 세계에 따라 확장되어진다. 분해되어지는 일이 해결되는 것은 결국에는 영웅의 희생(혹은 처벌)을 통해서가 아니라, 이전에 약탈당한 그의 권력을 다시 확립하는 것이다. 프로스페로는 햄릿, 멕베스, 리처드 3세, 그리고 영국 왕좌에 이르는 모든 청구인 (모든 등장 인물들은 그들의 희생이나 몰살을 통해, 즉 정당성으로의 귀환을 통해, “잘 풀려나갈” 상황 속에 내맡겨진다)들과 구별된다. 바로 그 이유로부터 그는, 애초에, 정당성의 수혜자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템페스트는 비극이 아닌 영웅적인/역사적인 드라마이다. 왜냐하면, 만약 이 연극이 “잘 풀려나간다”면, (프로스페로의 동생, 딱히 심각해보인 적 없는 약탈자-분해로부터 위협받은 적이 없는 밀라노 도시의) 공동체의 관점이 아니라, 오로지 세계에 대한 그의 권력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 서양 문명을 잉태한, 영웅의 관점에서 볼 때이다. 식민지 해방된 캘리번이 이 넓은 지역을 점령하고 프로스페로의 투영적인 정당성에 도전한다. 그는 두가지 방법으로 그렇게 하는데, 신화적, 서사적, 또는 비극적 사건이 이어지도록 했던 같은 방법들이다: 서정주의적 개인의 열정과 정치학의 집단적 관행을 통해서이다.
사실 서사시와 비극이 서구(‘도시’가 자신의 존재성을 스스로 확립한 이후로)에서 진행되었을 때, 그들은 이 두가지 방법에 굴복했다: 서정과 정치, 둘 모두 공개된 곳에서 개개인이 한 인간으로써, 즉, 집단 공동체의 신성한 신비를 떠난 개인으로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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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캘리번의 서정과 정치는 서사적인 힘과 비극적인 폭로로 함께 이 신비함을 되살렸고, 더군다나, 신화에 깔린 편협성으로 돌아가지 않음으로, 정당성이 확실하지도 않고 신성한 것도 아닌 새로운 (그러므로 연약하고 위협받는, 지구의) 공동체의 질서를 향해 나아갔다. 비극은 여기에 폭로의 새로운 예술성에 대한 새로운 요구, 새로운 목적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세계(사람들의 삶의 에너지)에서 위협받는 것은 문화들의 정당성 뿐만 아니라, 위협받는 것은 동등성을 띄는 그들의 관계이다. 근대 서사시와 근대 비극은 각 문화의 불투명성(더이상 즉자 卽自 en-soi 는 아니지만)을 제안함과 동시에 그들의 관계에서 투명성을 상상해냄으로, 국가 저마다의 특수성을 통합시키는 것을 제공한다. 상상하는 것. 왜냐하면 이 투명성은 정확하게 즉자가 아니다. 그것은 어떤 특정한 정당성에 뿌리내리지 않는다. 따라서 비극의 폭로가 연속체로 (확장에서) 향하고 과거로 향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한다.
근대 서사시와 근대 비극은 정치적 의식을 (더이상 견디기 어려운 순진한 의식이 아니기에) 표현할 것이나, 누군가는 시민 광란에서 벗어난 의식을 표현한다; 그들은 말과 글이 일치하는 지점에서 서정주의를 기초틀 안에 넣을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의 일치점들 안에서, 사라지는 것 없이 (그리고 엘리엇이나 클로델의 작품에서 의도한-기독교의 비극 같이 진실을 일반론으로 바꾸지 않고), 각자의 것을 포기하는 것 없이 전체주의로 가는 시발점이 될 것이다. 그런 방법으로 근대 서사시와 근대 비극은, 환원적 투명성으로의 ‘다른 것’과의 합류되어질 필요 없이, 특정한 친척을 맺어나갈 것이다.*
*관계의 상상된 투명성은, 그러한 방식으로, 일반화해 나가는 보편성의 환원적 투명성과는 반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