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큐라티스트 Curartist” 큐레이팅하는 예술가의 필연성

艺术家|荒村医(Ei Arakawa)at his performance
艺术家|荒村医(Ei Arakawa)at his performance

큐라리스트=큐레이팅을 하는 예술가=예술을 하는 큐레이터

글_이예현

Curartist=Curating artist=artist-curator

2011년 “Monopol” 잡지에 아담 Adam McEwen에 의해 기획된 팔레 드 도쿄 전시를 언급하며 “큐라티스트Curartist”라는 단어가 처음 소개되었다. 큐라티스트는 큐레이터curator와 아티스트artist의 두 영역이 합쳐진 개념으로, 큐레이팅을 하는 예술가를 칭한다. 다소 단순하고 유치한 이 합성어의 파생은 예술가와 큐레이터의 전통적인 구분이 허물어지고 있음을 드러냈다. 그리고 2013년 ONCURATING 메거진 19호 에 Between Hype and Attitude. Motivations, Presentation Strategies and Fields of Conflict for “Curartists” 라는 제목의 Winfried Stürzl의 글이 기재됐다. 그는 2011년 7월 8-9일에 걸쳐 있었던 Kunstbüro der Kunststiftung Baden-Württemberg에 개최된 심포지움 “왜 예술가들은 기획하는가 Why Artists Curate”를 회상하며 큐레이터와 예술가의 모호한 경계선을 추적했다.

심포지움에서는 Byung Chul Kim, Andreas Schlaegel, Marcus Weber, Gunter Reski, Tilo Schulz의 큐레이팅을 하는 예술가들(curating-artist, artist-curator)이 소개되었는데, 이들은 모두 저마다의 큐레토리얼의 경험으로 예술과 기획의 합치점(혹은 다름의 병행)에 대한 현상을 해석했다. 큐라티스트의 출현에 대해, 안드레아 Andreas Schlaegel는 현재 예술 사회 시스템의 딜레마의 돌파구로써 자기 표출에 동기부여가 되었다고 말하며, 기존의 예술가로써는 자립할 수밖에 없음을 다른 이들과 공통적으로 말했다. 예술가가 직접 큐레이팅을 하게되는 현상에 집중하여 그 이면에 큐레이터란 존재에 대해 재고해 볼 수 있는 기회로 이어졌다.

큐레이터의 정의는 사실 경계선을 그어놓고 명확히 구분하기에 어렵다는 것을 인식해가는 과정에 놓여있다. 본래 미술관 내에서 전통적인 방식의 작품을 분석하며 연구하고 보전하는 직업이었던 큐레이터는 예술의 수용을 매개하고 “창작적 행위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 수 있는지 (…) 미지의 것을 추적하는” 현실적인 매개자로써 정의할 수 있다. 한즈 울리히는 ‘모든 것은 중간적 존재다 Everything is in-between’ 라는 강연에서 ‘중간자적인 큐레이터의 위치’를 언급하며 유연함, 역동성, 유동성의 모습을 그려냈다. 마치 매개자, 중개인의 역할처럼 양자의 중간에서 상황에 개입해 질서를 구축하는 중립적인 지략가이다. 그리고 전시관련자와 작가를 연결해주고 자본과 예술시장을 연결하는 네트워크를 지닌 서비스 제공자이기도 하다. 이러한 외부적인 요소를 고려한 큐레이터의 이면에는, 자본과는 별개로 예술적인 구성의 다양한 과정에 참가하며, 예술 시스템에 반향을 일으키기도 했다.

1990년대 후반 이후에 그룹 전시들의 부흥을 돌아보자면, 예술적 실천이 변화하는 조짐으로 큐레토리얼 실험들이 이뤄졌고 구덴과 마타-클락 Gooden and Matta-ClarkFOOD같은 예술가가 운영하는 메트로폴리탄의 교류 공간으로서의 artist-run space도 있었으며, 아우트Aout의 머테리얼Materaial 의 기획처럼 작은 기관들이 개방적이고 실험적인 큐레이팅도 진행되었다. 독립적이기에 개개인의 단상 위에서 생소한 전시를 기획하며 자신만의 큐레토리얼적 이데올로기를 쌓아나갔다. 그들마다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지만 큐레이터마다 자신의 지역에 한정적으로 활동했다. 큐레이터들의 아방가르드하며 참신한 기획들은 예술의 이론을 행위로 실천하는 예술가적인 면모를 보여주기도 한다. 큐레이터의 본연의 역할 그 이상으로 예술적으로 접근하며 예술가들과 동등한 창작의 대열에서 전시를 기획했고, 예술가들에게 스스로는 할 수 없었던 작품 재현의 한계점을 넘어 도전적이고 다각도에서의 미학적 해석도 제시했다.

FOOD. The Revolutionary NYC Restaurant - Art Food Lab
Carol Gooden, Tina Girouard and Gordon Matta-Clark, FOOD, Soho, New York.

2000년대 이후의 교통과 미디어의 급진적인 파급력에 이들의 활동 영역은 넓어졌다. 범세계적으로 모든 예술을 같은 시공간 선상에 놓아 동시대 미술 contemporary art의 특성상, 모든 예술가들의 흐름을 공유하는 듯한 포괄적인 유행이 일기 시작했다. 베니스 비엔날레 Vennice biennale, 바젤 Basel, 도큐멘타 Documenta 같은 횡단-문화적인 미술 시장이 폭발적으로 주목을 받았다. 범세계적인 문화 예술을 동일한 플랫폼 위에서 공유한다는 점에서 비엔날레는 동시대 미술의 상징적이고 주류를 짚어내는 역할을 했다. 그렇게 예술 사회의 급격한 구조적인 변화에 제한된 지역들을 넘나드는 전시와 각 문화의 예술가들을 연결하는 큐레이터의 포지션은 급격하게 가시화되었다.

근대의 미술관들은 흥미를 잃어가는 관객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1990년대의 스타성 큐레이터들의 사회적 영향력이 절실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미술관이 할 수 없었던 실험적이고 사회 비판적인 기획을 하던 선구자들에게 협업이나 디렉터의 자리를 제안한 것이다. 그들은 안전하게 미술관에 들어가 수익성에 대한 걱정없이, 예술가들이 기존의 조건으로 할 수 없었던 것을 제안하며 기획의 스펙트럼을 넓혔다. 주목을 받게된 큐레이터의 모습은, 아방가르드하고 여러 예술가들의 교차점이 될 수 있는 매력적인 이미지로서 젊은 사람들에게 선망되는 직군이 되고, 그 수는 늘어가는 추세이다. 하지만 기획자의 인구수를 받쳐줄 수 없는 예술 기관에서는 수용하지 못하며 새로운 큐레이팅의 환경을 지원하거나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큐레이션은 점점 기관화되가고 큐레이터 또한 기관으로 쏠리게 되는 추세이다. 기관에 소속되지 못한 이들은 제정적 독립으로 큐레이팅을 실천하고 있지만 현실적인 수익 구조에 창조적인 기획이 제한된다.

반면에 줄을 지어 출판되는 비평적인 큐레이션 관련 저술들에서 큐레이팅의 구체적인 방법론들이 제시되고 있다. 각 큐레이터들의 기획들이 미시사적으로 연구되어지고 이에 따른 큐레이팅의 이론적이며, 학술적인 개념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하지만 실천이 부족한 예술 사회 시스템에서 이에 대한 방법론만이 비대해져가고있다. 큐레이터의 시장은 확대되었지만, 학술적인 이론들이 들어서며, 큐레이터는 관객 수를 유치하기 위해, 혹은 지원을 받기 위한 정당을 지지하기 위해, 큐레이팅의 성격은 대중의 관심에 좌지우지되는 방법론화된 전시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기관에 속한 큐레이터들과 달리 프리랜서로 활동하는 큐레이터라고 할 수 있는 한즈 울리히, 베이트리체 본 비스마르크, 니콜라스 부리오처럼 관객과 문화예술계에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이들에 의한 큐레이터의 영역이 점차 거대해지며 큐레이터들은 예술가들과 큐레이팅을 할 수 있는 조건에서 우위를 점거하고 있다. 이 스타성의 큐레이터는 주로 대형기관과 협업하여 중견 이상급의 예술가들과 작품을 기획하고 있다. 그들의 실험적이고 작가를 발굴하던 모습은 근래의 베스트셀러가 된 자서전과 확립된 자시만의 이데올로기에 묻혀졌다.

이런 현대 큐레이터의 모습은 예술가에게 비관적임과 동시에 창조적이기를 포기한, 분석과 비평을 늘어놓는 이론가의 모습, 혹은 자신의 작품이 큐레이터에게 호감 가길바라는 권위적인 입장으로 비춰지지 않을까 싶다. 이런 현상으로 큐레토리얼적 노력의 정체성으로 예술가들이 흡수되지 않을까 경고하는 목소리도 있다.  실제로 우리가 기억하는 Chambre 763 의 참여 작가, 작품보다는 기획자인 한스 울리히, 그의 이데올로기와 큐레이터로써의 역량을 기억한다. 

King of Table, a ‘humor restaurant’, 작가 만드는 음식을 먹기 위해선 관중들 앞에서 행위예술을 보여줘야만 한다. Performance-Hotel과 같은 맥락의 기획하는 예술이다.

큐라리스트라는 개념은 이러한 큐레이터와 예술가들의 상호보안적인 반향으로 해석된다. 레스키와 베버 Gunter Reski and Marcus Weber는 큐레이팅하는 예술가들은 “전문적인” 큐레이터들에게조차 모델이 되어가며 예술사회의 교정적인 역할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앞서 언급한 심포지움에 소개된 Byung Chul Kim은 슈투트가르트Stuttgart에 거주하는 예술가로, 참여 프로젝트성의 Performance-Hotel (2009-2010)이라는 일년 동안의 프로젝트를 운영하며 예술가 기획력을 보여주었다. 그의 호텔은 행위 예술을 하는 대가로 하룻밤의 숙박비를 지불하는 개념이다. 호텔이라는 휴식에 대한 욕망적인 공간, 하루의 물질적인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자유의 공간에서 투숙객은 그날 밤의 값을 치르기 위해 특정 시간에 맞춰 사람들 앞에서 공연을 펼친다. 프로젝트의 구체적인 제정, 홍보, 관리 체계 등에서 큐레토리얼 기술들이 어떻게 관여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는 관객들을 호텔로 끌어들였고, 그들에게 프로젝트를 이해시키고 일종의 유희적인 예술적 규칙 속에서 지속적인 행위 예술로서의 전시 기획의 형태를 이끌어 내었다. 그가 보여준 큐레이팅은 예술과 관중의 사이에서 상황을 만들고 두 실타리를 엮어내는 독립 큐레이터의 기획 전시처럼 정확하게 주고받는 역할놀이에서 그의 예술을 스스로 중개했다.

이와 비슷하게 독립적이고 적극적인 예술가들의 모습을 포착하게 된다. 이 부분에선 마치 기존의 큐레이팅의 기술적인 측면: 상업적인 욕구와 맞닿은 효과적인 홍보 방식, 사회와의 관계성과 철학이론적 재현, 전시 매개의 통로, 정치성의 스케일 등에 크게 관여하지 않는 모습을 보인다. 오히려 예술가 고유의 개성적인 창조성과 사회 반항적인 영역을 가지고, 현실적으로 어설픈 기획을 실천하는 행위에 의의를 둔다. 이 외에도 예술가들은 큐레토리얼 기술적인 측면에서 전시를 매개하는 일, 기록을 하는 큐레이팅의 실제적인 기술도 예술의 과정에 포함시킬 수 있다는 것도 보여준다. 개념을 벗어나는 행위에 중점을 두고 스스로의 길을 찾아가는 예술가들에게서 예술 사회를 반영 당한 셈이다.

큐라티스트의 개념은 새로운 정체성이 등장했다기보단 예술체제에 균형을 맞추는 경향이다. 테이트 모던 Tate 의 예술가들을 위한 정의 artist term에서 artist-curator에 대해 “상업적인 체제에서 벗어난 예술가들이 어떻게 전시가 이루어져야 하는지에 대해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정의 내린다. 이들은 반예술의 개념처럼 배타적이고 독자적인 예술을 선포한 것이 아닌 사회에 다른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다. 표류하는 보트에 사람들이 한 쪽으로 치우쳐 노를 저으면 앞으로 나아가지 않고 공회전하며 맴돌 뿐이다. 그러다 몇몇이 본능적으로 배의 반대편으로 무게중심을 맞추며 배의 반대편으로 움직인다. 이처럼 큐라티스트도 큐레이터와 예술가의 균형 맞추려 스스로 위치를 옮기고 균형을 맞추는 모습이다. 현재 비대해진 큐레이팅 시장에 해결책보다는 실천으로서 균형을 맞추는 큐레이팅을 하는 예술가는 현대 미술 시스템에서 자연스러우며 필연적인 존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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