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의 시학
에두아르 글리상 Eduard Glissant
*이 글은 출판이 아닌 개인 번역작업이자 예술활동입니다.
상상
생각한다는 것은 주로 생각만으로도 지속되는 무차원의 공간 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 생각은 그자체로 세상 속에 멍하니 넔을 놓는다. 그것은 상상의 (다양한 국가, 민족, 인종의)사람들, 그들의 다양한 시학들을 알려주고, 그들 속에서 생각의 위험이 실현되어지는 것을, 의미하며, 변형되어진다.
문화는 생각한다고 주장하면서도 혼란스러운 여정을 항해하는 사람들을 경계시키는 것이다. 진화하는 문화들은, 그들의 지반을 이루는 통합-다양성을 딛고 넘어간다고, 관계를 추론한다.
생각은 과거의 상상을 이끌어낸다: 지식이 생성되어지는 것. 누구도 그것의 가치를 매기기 위해 멈춰낼 수 없고, 전해지는 것을 근절시킬 수 없다. 그것은 어느 누구도 절대 소유할 수 없는, 결코, 꼿꼿이 선 채로 자만해선 안되는, 공유되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I
접근방법들
해안으로 가는 하나의 길, 천 개의 항로들
1
오픈 보트
준비나 도전도 없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추방된 경험을 견뎌낸 아프리카인들에겐, 미지의 세계에 맞서게 되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끔찍한 것이었다. 1
그들의 일상, 익숙한 땅, 그들을 살펴주는 신들과 수호신같은 공동체로부터 끄집어내어진 첫 번째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아무것도 아니다. 심지어 그것이 예상치 못한 것일지라도, 추방은 견딜 수 있는 것이었다. 두 번째 밤의 암흑이 고문하며 인간이 버틸 수 없는 쇠약의 상태에서 누구도 감당할 수 없을 지옥(Gehenna)으로 이끌려간다. 이백 명의 가까운 사람들이 그 삼분의 일도 수용하지 못할 공간에 억지로 쑤셔 넣어진 상태를 상상해보자. 구토, 맨 살갗, 들끓는 이 떼, 축쳐진 시체들, 움츠려들어 죽어가는. 만약 할 수 있을 것 같다면 상상해보자, 소용돌이 치는 충혈된 눈으로 배의 갑판까지 올라가는 모습을, 그들이 타고 올라간 경사를, 검은 태양이 수평선 위에 놓이고, 순간 일어나는 현기증에, 아찔한 하늘은 파도에 회반죽 칠해진다. 두 세기가 넘도록 이 경로로 이, 삼천만 명의 사람들이 출항 당했다. 종말보다 영원에 가까운 쇠약 속에 지쳐갔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아무것도 아니다.
1 노예 무역은 노예선의 비좁은 출입구를 통해 들어왔으며, 사막의 캐래밴들이 기어다니는 것 같은 항적을 남기었다. 이렇게 그려질 수 있을 것이다: ‘>~~~~<’ 동쪽에 아프리카 국가들; 서쪽에 아메리카 대륙의 육지들. 이 생명체는 가는 섬유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아프리카 언어들은 영토를 빼앗기게 되었고, 따라서 서양의 크리올화에 기여하게 되었다. 이것은 서술적 단어의 힘과 구술의 충동 사이의 가장 완전히 알려진 대립이다. 노예선 위에 쓰여진 유일한 것은 노예들의 교환 가치를 기재한 회계장부였다. 그 배의 공간 안에서 추방된 사람들의 외침은 플란데이션의 영역에서와 같이 억눌러졌다. 이 대립은 오늘날까지 여전히 울려퍼진다.
2
한없이 깊은 심연과의 동거에서 끔찍한 것은, 세 차례에 걸쳐 미지의 세계로 이어진다. 먼저, 당신을 선박의 뱃속으로 떨어뜨렸을 때이다. 당신의 시적인 환상에선, 선박에 뱃속 따위는 없다; 그 선박은 빨려내거나 삼켜내지 않고, 열린 하늘 아래서 항해하고 있을 뿐이다. 반면, 그 선박의 뱃속은 그대를 해체시키고, 당신이 울부짖게 될 존재하지 않는 세계 속으로 던져 떨어뜨릴 것이다. 그 배는 자궁, 그 곳의 깊은 심연이다. 그것은 그대의 발버둥치는 아우성을 일으킬 것이며, 다가오는 모든 것들을 한 목소리로 이루게 할 것이다. 비록 고통은 혼자 감당하게 되겠지만, 미지의 세계에서 아직은 알지 못하는 타인들과 함께 공유한다. 이 선박은 그대의 자궁이자 행렬, 그러면서도 그대를 몰아내는 것이다. 이 배는: 죽음을 선고받은 생명들만큼 많은 시체를 임신한다.
다음 심연은 바다의 깊이였다. 언제나 함대들이 노예선을 추격했왔을 때, 가장 빠른 판단은 선박의 화물들을 밖으로 던져내는 것이었고, 쇠사슬과 쇠추들로 짓눌린 배를 가볍게 만들었다. 그 수면 아래의 이정표들은 서아프리카의 기니 만(Gold Coast) 와 리와드 군도(Leeward Islands)의 이동 경로를 표시해주었다. 에마랄드빛 화려한 바다를 항해하며, 그것이 침울한 대서양 횡단이거나, 영광을 독차지할 요트(Regatta)경기이거나 욜(Yoel)과 고미에(Gommier)의 전통적인 경주라도, 여전히 그것의 미역같은 빛으로 가장 깊은 바닥들을 떠올려진다. 심해 바닥에 줄로 늘어선 그 간격은, 아직까지도 부식되어지지 않은 쇠추와 쇠사슬이 놓여져 바닥 위에 구두점을 찍듯이 나아간다. 사실 심연은 토톨러지이다. 즉, 모든 바다, 그 전체가 결국 모래의 즐거움 속으로 부드럽게 무너지며 하나의 광대한 시작을 만들겠지만, 그 쇠추들와 쇠사슬들로 시간 표시되어진 누군가의 시작은 녹색으로 변해버린다.
그러나 미처 보이기도 전부터 해안가들이 제 형태를 갖추려 하는, 그 모습들이 충분히 고뇌되어지기도 전에, 미지의 것으로부터 어떤 고통들이 밀려왔는지! 어찌할 도리 없이, 그 세상을 무너뜨리는 심연의 얼굴은 저어가는 노예선의 뱃머리 앞에 길게 드러누워있고, 창백하고 불분명한 속삭임, 그것이 폭풍을 몰고오는 구름, 비 혹은 이슬비, 아니면 따뜻한 모닥불로부터의 연기인지 알 수 없을 것 같다. 강둑은 노예선 양 옆으로 사라진지 이미 오래지났다. 세상에 어떤 강이, 중앙에 위치하지 않았던가? 길다랗게 늘어지는 것 말고는 없지 않았었나? 이 배는 영원을 향해, 어떤 조상의 영혼도 느낄 수 없을 세상이 아닌 곳으로 항해하는 중일까?
3
이 넘칠 듯한 물에 평행한 세 번째 심연의 변신은, 여러 세대 이후에 다시 되찾아지기 위한 것이 아닌-점차 닳아져버리는-기억의 푸른 사바나 혹은 상상으로써, 뒤로 남겨져버린 형상들의 역상을 투영했다.
땅-바다로 이어지는 횡단의 고행은, 그대가 알지 못하는 지구이다, 언어가 사라짐을 느끼고, 신들의 방언이 사라지고, 일상적인 물건들, 가장 친숙한 짐승의 고정되었던 이미지 조차도 사라져버린다. 언젠가 맛보았던 것의 희미해져가는 미각. 쫓아가는 대지와 초원의 황갈색 향기.
“Je te salue, vieil Ocean!”(네게 인사한다, 늙은 대양아!) 너는 아직도 우리가 태어난 고요한 선박을 물마루에 보존하고 있다, 너의 깊게 갈라진 틈은 우리의 무의식, 달아나는 기억들로 깊은 자국이 패였지. 그러곤 너는 새로운 해안들을 펼쳐보여, 바로 우리가 검붉게 굳은 상처들로 연결고리 지어진, 우리의 붉게 달아오르는 입술들과 억눌러지는 외침들.
이 심연의 경험은 심연의 안과 바깥에 놓인다. 절대 탈출하지 못한 사람들의 극심한 고통: 그들은 노예선의 뱃속에서부터 심연 바닥의 보랏빛 뱃속까지 곧장 따라 들어갔다. 그러나 그들의 시련은 죽지 않았다; 새로운 땅의 공포, 잊혀지지 않는 이전의 땅, 그리고 마침내 강제된 땅과의 동맹, 고통받고 구원받는 이 연속적이고 불연속적인 것으로 빠르게 되살아났다. 심연에 대한 무의식적인 기억은 이러한 변화들을 위한 충적층 역할을 했다. 그들의 깊게 갈라진 심연을 잊었지만, 그 곳에서 새 삶을 개척해 나간 사람들의 열정을 상상할 수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당시 형성된 주민들은 이 돛을 엮어내었다. 그들은 그것을 이전의 땅으로 돌아가기 위해 사용하지 않고, 예측할 수 없고 할 말을 잃게 만드는 땅에 일으켜세웠다. 그들은 그들과 마찬가지로 영구적인 파괴에 의해 추방된 최초의 주민들을 만났다. 아니면 그들은 그저 이 사람들의 황폐되어진 흔적을 잠시 포착했을지도 모른다. 저-너머에-육지는 스스로에-속한-육지로 변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제서야 펼쳐지는 돛의 꿈은 심연의 흰 바람들로 물들어진다. 따라서, 심연에 의해 투영되어지고 영원한 심연의 자궁에 잉태되어지고, 무한한 절대 미지의 것은 결국 지식이 되어진다.
4
단지 한 특정한 사람들의 특정한 지식, 식욕, 고통, 그리고 즐거움 뿐만 아니라 전체의 지식, 그 심연부터 있어왔고, 전체 안에서 관계의 지식을 자유롭게 펼쳐나가는 것에서 더 거대해졌다.
마치 최초의 강제 이주처럼 어떤 과감한 저항은 드러내지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그것의 예견과 관계의 실체적인 경험은 허영심과 아무것도 관계되지 않는다. 심연을 거쳐간 사람들은 그들이 선택받았음을 자랑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이 모든 근대의 영향력을 생산해내고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그 심연의 망각이 그들을 찾아오는 연장선에서 그들은 관계에 살며 그 방식을 명확하게 했고, 결과적으로, 그들의 기억은 격렬해졌다.
비록 이 경험들을 통해서 그대를 그 바다의 심연으로 띄워진 최초의 희생자들로 만드는 예외로 만들었지만, 그것으로 공유된 무언가가 되었고, 그들의 후손들인, 우리를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하나로 만든다. 관계는 이국적인 것이 아니라 공유된 지식으로 이루어 진다. 이 심연에서의 경험은 교류의 가장 훌륭한 요소라고 이젠 말할 수 있다.
우리에겐, 어떤 예외없이, 얼마나 거리를 벌려 내도 상관없이 그 심연은 미지의 세계를 투영하고 시야가 되는 것이다. 그 아주 깊은 틈 넘어 우리는 미지의 것에 도박을 건다. 우리는 이 세계에 속한 게임에서 편을드는것이다. 우리는 새로 유입된 서인도인을 맞이하며 환영하고 지지한다. 그리고 이 관계는 폭풍과 우리의 선박을 기릴 수 있는 심오한 평화의 순간들을 만든다.
5
이것이 우리가 시에 머무르는 이유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논쟁의 여지가 없는 모든 기술들에 동의함에도 불구하고; 관여되어져야만 하는 정치적 비약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굶주림의 공포와 무지함, 정복되어지기 위한 고문과 대학살, 길들여지기 위해 가득 채워진 지식, 우리가 통제해야할 기계의 모든 부품의 중량, 우리가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숲에서 도시로, 이야기에서 컴퓨터로-지나갈 때 지쳐버린 섬광들은 우리가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 속삭임, 구름이나 혹은 비 또는 평화로운 연기. 우리는 우리를 두렵지 않을 미지의 일부로, 관중으로 알고 있다. 우리는 시의 외침을 외친다. 우리의 배는 열려있고, 우리는 모두를 위해 항해한다.